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의의 및 평가 ==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결국 독일을 껴안고 함께 자폭한 전선으로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물론 독일이 영국 세력이 지중해에 존재하는 한 신경을 안 쓰진 않았겠지만 20만명에 가까운 인력을 투입하진 않았고 좀 더 차분한 외교전과 공습 작전으로 나왔을 것이고 소련 방면으로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허투루 날려먹은 물자나 병력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당장 독일군은 20만명에 가까운 전력을 북아프리카에 투입했는데 이 20만명이 독소 전쟁에 투입되었다면 좀 더 독일의 동부전선 붕괴를 지연시켰을 수도 있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그리스]]까지 공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이때 그리스는 지속적으로 회유했으면 추축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를 국가였다. 수많은 야사들이 전하는 이탈리아 군의 졸전과 달리 사실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전역]]에서 [[독일군]] 못지 않게 영연방군에 맞서 선전한 [[이탈리아군]]도 제법 많았고, 롬멜이 등한시한 '''보급과 진지구축'''은 [[이탈리아군]]이 전담하다시피 한 것에서 보이듯 실제의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따라서는 꽤 분전하여 잘 싸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3500명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병력을 막은 폴고레 공수--여단--사단도 있다. 특히 이 부대의 [[사령관]]은 독일군의 지리멸렬함을 보고 '''"평상시에는 상관처럼 거들먹거리다가 전투만 시작하면 겁쟁이처럼 사라진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롬멜이 공세를 취할 때 수적인 면은 [[이탈리아군]]이 전원 담당했으며 롬멜과 자국군의 후퇴를 위해서 전차의 연료들이 떨어지자 스스로 [[고기방패]]가 되어 영국군을 맞아 전멸한 [[아리에테]] 기갑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전과는 상당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소수의 몇몇 예이지 이탈리아군이 위에 서술한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였다면 애초에 독일이 아프리카 군단 따윌 만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독일군이 투입된 것도 무솔리니가 되지도 않는 이집트 침공을 실시했다가 박살나고 트리폴리까지 밀려서였다. 전체적인 레벨에서 워낙 삽질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무능한 이탈리아군이란 타이틀을 달게 됐다. 애초에 토브룩이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점만 생각봐도 독일-이탈리아군은 결국 이탈리아 영토 회복하겠다고 분전한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충분히 까여도 할 말 없다. 1941년 독일은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서유럽에서 영국과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여기에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 [[히틀러]]가 절대 2개의 전선에서 싸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한 맹세 따위 진작에 엿바꿔먹었다. 당시 독일의 역량으로는 3개의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북아프리카 군단]]은 보급순위에서 항상 후순위였고 애초에 독일의 물자가 부족한데다가 '''바다를 건너는 최장의 보급거리''' 그리고 이나마도 독일해군은 영국해군에게 대서양에서 탈탈 털리고 있어 이탈리아 해군에게 짬 때렸고 덕분에 그나마도 물자보급을 제대로 받은 적이 드물다. 사실 [[이탈리아 해군]]들이 [[지중해]]를 장악하거나 [[영국 해군]] 견제만 잘해줬어도 하다 못해 [[몰타]]만 제대로 조졌어도 사정이 조금은 나았겠지만 추축군이 [[크레타]]에서 [[공수부대]]가 받은 타격이 공수작전 금지로 만들 만큼 타격을 받아서 사실상 몰타를 점령할 능력이 없었던 점부터가 문제였다. 차라리 북아프리카에서 일을 벌리기 전 무리해서라도 몰타와 크레타의 영국 세력을 조지고 들어갔으면 모를까 그것도 해결하지 않은채 이집트를 쳤으니.. 애초에 [[크레타 섬 전투]]도 이탈리아의 [[뻘짓]]으로 탄생한 비극이다! 하다못해 이탈리아라도 제대로 보급을 해줬으면 해볼만 했다면서 이탈리아를 까는 경우도 있는데 '''이탈리아의 공업생산력과 수송력은 독일의 예상보다 더 나빴다.''' --일본보다 더 나쁜 생산력?--[* 사실 일본군은 생산력 자체는 열악하지 않았다. 특히 전투기 면에서는 단기간에 수천대를 상회하는 전투기를 찍어낼 정도로 괜찮았다. '''[[미합중국|상대방이 그 물량과 품질의 국가인데다가]] [[카미카제|제 손으로 격파속도가 생산속도를 추월하게 만들어서 문제였지.]]'''] 하지만 지중해의 제해권을 잠깐이나마 이탈리아 해군이 우세하게 가져간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분명 보급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몰타 방공전 때 2304척의 이탈리아 상선이 격침되었는데 이 수치는 이탈리아 수송전단의 '''72%'''에 해당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제 10 강습 부대(Decima Flottiglia MAS)가 1941년 7월 1일 몰타의 성 엘모 다리를 사보타주하고 독일 잠수함대와 이탈리아 공군이 연계하여 몰타로 가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등 이탈리아라고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북아프리카 전역과 같이 생긴 지중해 전역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영국 해군의 세력도는 거의 팽팽했다. 물론 케이프 마타판 해전처럼 이탈리아가 탈탈 털린 적도 있지만 하푼 작전처럼 영국이 전함을 포함한 함대를 끌고 왔는데 반대로 이탈리아 구축함이 보급선만 털어먹고 튀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탈리아군의 활약에 비해서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자국군을 포함한 추축군에 몰고온 결과가 파멸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역에서 보여준 롬멜의 탁월한 작전지도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에게 여러차례 승리를 거둔 덕분에 명장이란 평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롬멜을 까는 주장도 있다. 롬멜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쓸데없이 롬멜이 '''사령부 명령을 어기고 독일군 역량 이상으로''' 나대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군의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논리가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은 있다. 독일군 사령부가 애초에 의도했던 건 남부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일정 방어선을 고수한다고 나섰다면 영끌한 영 연방군의 공격에 나가리 났을 것이 분명했다 애시당초 롬멜에게 준 2개 사단은 보병사단이 아니라 차량화사단, 기계화사단이다. 당시 영국군 지상부대는 그리스에서 분쇄된 이후 유럽 전역에선 별 다른 전선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는데 즉 그건 단일 표적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이었다. 당장에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과감한 기동전술로 초기에 득세하자 [[윈스턴 처칠|처칠]]은 곧바로 신형 전차인 [[크루세이더 전차]]를 투입하고 [[배틀액스 작전]]으로 롬멜을 압박했다. 만약 독일군이 수세적인 포지션에서 방어했다면. 이미 1941년에 영국군의 물량에 격파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걸로 무슨 일정 방어선을 고수할까? 그렇다고 OKH가 바보는 아니었고 애초에 독일 본국도 기동방어를 염두에 둔거고 보급이 어려운걸 사전에 파악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공격적 기동전술로 프랑스 군을 뒤흔들었던 롬멜에게 2개 기계화사단을 주어 트리폴리에서 보급이 받쳐주는 한도내에서 기동방어로 리비아의 완전상실을 막으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롬멜이 공세를 시작하자 본국의 브라우히치 원수가 노발대발한건 그 2개 사단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만으로 공세를 시작해서였고 당시 그리스 전선에 전력을 차출당해 약체화된 영국군이 롬멜의 허세에 속아 패주했는데 토브룩까지 도달한 롬멜은 토브룩의 방어상태를 한번 건드려 보는 정도가 아닌, 작정하고 공격을 가해 불필요한 전력손실을 초래해서 브라우히치 원수가 폭발(불응하면 해임하겠다며 토브룩 공격중단을 명령)했다. 만약 롬멜이 자신이 북아프리카에 온 이유 즉 독일 수뇌부의 진정한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려 했다면 토브룩은 위력 정찰 정도만 해보고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해 철수준비를 했다가 영국군이 반격하면 트리폴리 쪽으로 후퇴하면서 영국군의 공세종말점에서 역습, 다시 토브룩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전력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시일을 끌어야 했다. 실제로 롬멜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몇차례 왕복했지만 독일 본국에서 원한 기동방어의 형태가 아닌 롬멜의 무리한 공세와 그 과정에서의 영국군의 반격에 의한 것이었고 전력손실과 보급부담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당장에 독소 전쟁과 마켓 가든 작전 당시 만슈타인과 발터 모델이 선 보인 기동방어 전술을 비교해보면 얼마나 롬멜의 공세적 기동이 당시 추축국의 복잡한 상황속에서 자충수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멜이 천성적으로 공격전에 우월한 능력을 보이며, 지리하게 연합군과 소모전을 벌이느니 '''한방에 박살내서 후환을 없애고 전선을 종결'''하려는 욕구가 강했으며,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전술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분명 불리한 전력이지만 공세적 기동으로 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면 그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때문에 위대한 도전에 따른 장렬한 실패였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사령관 하나의 성향으로 독일이 구상한 전역의 방향성 자체가 뒤틀린 것 그리고 방향성이 바뀌었을 때 그를 해결하기 위한 차후 방향성과 대응을 제시하지 않고 상부와 동맹군의 무능을 탓하며 나선 것부터가 훌륭한 문제다.[* 이건 독일 제국군, 국방군, 일본군 일선 사령관들에서도 잇달아 발견되는 현상이다.] 한개의 야전을 통솔하는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성향을 고수하다가 결국 멈출 수 없는 기동작전을 강요하는 열차를 탑승하게 되어 전체 군단을 파멸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 그 사령관의 역량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패배는 롬멜이 한개의 야전군을 이끌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게다가 만약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가만히 놔두고 북아프리카 전역에만 신경 썼다면, 크레타 건으로 공수작전이 금지될 일도 없었고, 몰타는 독일 공수부대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장악한 연합군은 히틀러의 우려대로 지중해를 장악하여 남부 유럽에서 추축군 세력으로의 압박이 가능한 거점을 확보했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이 마무리되고 병력이 재편되자 바로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시작했다. 덕분에 독일군은 헤르만괴링 공수기갑사단을 비롯한 정예군을 이탈리아로 보내야 했고 가뜩이나 급하던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양쪽에 보강가능했던 전력을 낭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